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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하게 얼마간의 hh00ii.com의 사용과 최근 hhooii.com으로 복원의 와중을 알려드립니다.
hhooii.com 의 기존 계약 회사인 I 사의 새로운 계약 갱신 요구와 당시에 필요치 않은 여러 부가 서비스를 포함한 고가의 새로운 계약으로 일방 변경 제안하여, 다른 곳을 알아보던 중 그간 g사가 있음을 알게 되어 새로이 계약을 하려는 와중에, g사와 Jun 14, 2021 밤 domain service 이전 계약을 하였고 몇 시간 이후인 Jun 15, 2021에 아직 도메인 유효기간이 수개월 남았음으로 실수였기에 g사에 철회신청을 email로 여러 차례 통보하였고 답변이 오지 않기를 몇 일이 지남에 본인의 신용카드에 금액 부과가 이루어져 당시에 신용카드 회사에 지불 정지를 요청하였고, 이 과정에서 g사의 고객 요금 반환이라는 다른 절차가 발생하였다고 하여 $20의 추가액을 요구합니다. 시간이 지나 신용카드 지불 정지요청 분으로 최초 구입액은 환불을 받았고, 이후에 g사와의 통화에 그들이 해당 추가 비용을 납부하라고 하여 이후에 분쟁이 지속되는 와중에, 내야된다 못낸다 왜내야 하는가 어쨌든 내라 등의 와중으로, hhooii.com이 잠시 g사에 이전되는 등 여러 불미가 발생하여 몇 일, 수 주를 지나고 수 개월을 넘기는 와중에 hh00ii.com을 한시적으로 개시하게 되었으며, 2022년 들어 도메인 유효 만료기간이 다가와 해당 $20을 지불하고 다시 도메인 이전을 하게 되어 I 사에 hhooii.com domain setup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깟 $20 갔고 뭘그러나 그럴 수 있을 것임에도 그것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통은 때로 왜곡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단편적인 이와 같은 한 예를 통해서도 누군가 중간에 일부만 알리고 듣고 그 얘기가 이렇게 저렇게 옮겨 간다면 내용은 가려지고 왜곡되고 주객이 전도되는 등의 여러 잘잘못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알기에 언제고 각 사람들의 여러 얘기를 종합하고 사실과 진실 여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며 이런 자세가 성숙함의 모습일 것입니다. 한편, 본의 아니게 이런 저런 체험을 더하게 되는 긍정도 없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실수라고 한다면 본인이 단지 email로만 상품 구입 철회 의사표현을 한 것이며, 구입 당시에 email로 g사와 서로 소통했었는데,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전화통화를 하지 않았다고 하는 불찰이 본인의 실수라고 한다면 실수입니다. 여하튼 본인은 현시점에서 반 년에 걸친 불통의 불만으로 손해 배상 소송을 할까 하려함이 없지 않았음에도 현재 이를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으로 극복하고, 물론 기독교인 소송을 업으로 하는 분에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만, 그만두어 다른 불만은 가리고, 다만 해당 g사에 관해서 이전 글로 언급한 바와 같이 과도한 부채 및 재무관리를 잘 하기를 바라며, 본인도 g사와의 계약 철회의 중요한 이유이기도 함, 금번을 계기로 가정과 산업 전반의 이런 과도한 부채 의존의 모습 있음에 경각을 드리우며 해당 관련 얘기를 마칩니다.
부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 부분을 좀 언급해봅니다.
역사적으론 물론, 근래 인플레이션의 발생과 이를 간과함은 그와 같은 과도한 부채를 적게 보이려는 방편이라고 하는 전문가 분들의 주장이 이해가 됩니다.
쉽게 말해 여러 부동산, 주식, 실물 등 투자 및 거래되는 자산의 가격이 상승해야 이미 가지고 있던 빚이 상대적으로 적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비해 높아진 가격으로 무언가를 팔아서 기존의 부채를 갚으면 남는 것이 과거에 비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인플레의 존재 이유인 것이죠.
물론 알맞으면 좋은 것이로되 언제나 과도함이 문제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알맞은 거품인가 그렇지 않은가 알맞은 거품은 보기 좋게 하는 삶의 욕구와 충족의 소통이겠지만, 과도한 거품은 본질을 망각하게 되어 결과가 긍정을 넘어 부정에 휘말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와중에 가장 피해보는 사람은 누굴까요. 물론 여타의 자산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일 것입니다. 가격이 올라 얻을 무언가가 없기에 자신은 계속 힘겨운 사회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 장점 가운데의 단점일 것입니다.
알맞음을 넘어 과도한 과욕의 부채의 결과가 어떠함은 역사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본인과 주변을 넘어 여러 다른 곳에 이런 책임을 넘기며 함께 걸고 넘어가려는 잘못된 관행이 있다면 이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래봅니다.
몇 경제 지표를 좀 보던 중에 그간을 넘어 금번 팬데믹을 지나며 부익부 빈익빈 부분의 정도가 상승했음을 여러 기사를 통해 알려지는 와중의 가늠함을 공유합니다.
fred.stlouisfed.org 미국 상위 1%의 부채 비중
fred.stlouisfed.org 미국 상위 1%의 주식 펀드 등의 비중
근래 자료를 좀 찾다가 이런 결과를 보게 되었으며, 최근 부자세를 언급하는 신문 기사와 그 출원 의도를 알게 됩니다. 다른 재능과 같이 금융재능도 존재하기에 부를 얻는 능력도 다를 수 있음은 실제일 것입니다. 여하튼 자만과 질시를 넘어 실제를 바라보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들 때문에 이 나라가 망하지 않는구나 라는 평가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좀 이상하지만.
돈의 추구 욕구가 곧 여러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긍정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음과 그렇다고 과도한 잘못인가 여부와 그럴 경우 항시 가려주는 것이 적절한가는 사회의 몫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지표는 어디를 향하게 될까요.
그간의 역사적 근거를 통해 부자에게 세금을 높이면, 모두야 그렇겠는가 싶지만, 일부는 거주지를 옮긴다고 합니다. 결국 효과가 떨어진다는 것이죠. 물론 일리있는 주장 같습니다. 인간의 본성으로 강요를 좋아할 사람은 드물지 않는가 싶습니다.
가진 것이 많다고 하여 가진 것이 적은 삶을 보고 어떤 감흥을 자각할 때까진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선과 악이 혼재하며 다루어지는 부분이 각기 존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부 자발적 부자세를 제안하는 모습도 있는 가운데, 향후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나아갈지는 모두의 숙제일 것입니다.
성경에도 “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 12:20) 란 말씀에도 여전히 묵묵부답인 존재가 있음은 그와 같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피조하신 세상에도 나름의 필요악의 균형 부분이 여전히 존재하기에 그렇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께서 당시 삶 가운데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힘듦을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기와 같음을 전하심을 통해, 당시 내면의 불의에의 심정은 이와 같은 당시에의 존재모습에 근간하신 것으로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삭개오라는 다른 부자에겐 분노와는 다른 감회를 소통하심도 있음에 일괄적인 성경 해석의 관점은 조심해야 한다고 보입니다. 나아가 불의를 위해 또 다른 불의를 사용함에도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부자가 때가 이르러 죽음에 그가 심판의 대에 서게 되었답니다. 낙타 바늘을 들고 있으란 어느 담당자의 지시를 따라 서있는데, 한참 후에 담당 심판자가 나아와 여태 살면서 앞서의 말씀을 생전에 듣지 못했는가 물었는데 생전에 못 들어 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사를 통해 그간의 뒷조사를 해 봤더니 맞는 얘기를 했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대기 장소인 연옥에 계속 거하며, 지상에 그 사람 주변의 기독교인을 대신하여 관련된 주변 천사가 뺑뺑이를 돌았다나요. 여담입니다.
부자라고 좋기만 싫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며, 가난하다고 좋기만 싫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인 여러 가능성이 존재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여하튼 각자의 때에 자극과 체험을 통해 알맞은 나눔이 일어나길 바래보며, 수퍼리치도 부자도 중상층도 중간층도 중하층도 하층도 극빈층도 존재 가능함을 부인할 수 없는 세상에, 물론 극빈층은 왠만하면 적을 수록 좋을 것이기에, 각자와 함께 알맞은 모습을 이루어 나가길 바래봅니다.
기계 자동화 등에 이상적인 관점을 두는 어느 시절에 관하여는 물론 잘되면 하층 극빈층의 역할을 기계 로봇 등이 할 수 있을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삶이 향상된 사람들이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인가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메타버스 등 여러 온라인을 통한 일자리와 시간 보낼 무언가를 가상의 세계에 구축하게 되는 것인가라고 생각을 해보면서도, 인간이기에 지니고 있는 신체를 알맞게 사용하는 것이 최선일 것으로 여기며, 결국 이에 관한 인간의 탐심을 잘 다루어야 한다고 보입니다.
인간에게 주신 이런 여러 모습은, 그것의 가능하게 하심으로 존재 가능한 것으로 여깁니다. 나아가 알맞음에 관해서도 놓치지 않기를 바래봅니다.
감사합니다.
Feb 2022